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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중순 1위 두산을 추격하는 NC에 비상등이 켜졌다.외국인 에이스 해커가 팔꿈치 통증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탓이다.지난 5월 17일 1군 명단에서 말소되기 전까지 해커는 8경기에 선발 등판해 51과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면서 6승 1패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하며 지난 시즌 다승왕(19승 5패)의 위력을 뽐내고 있었기에 그의 공백은 NC에 치명적이었다. 해커 빈자리를 메우고자 C팀에서 소방수로 긴급 호출된 이가 바로 신인 정수민(26)이다.정수민은 기대에 부응했다. 데뷔 첫 선발 등판이었던 지난 5월 19일 넥센전에서 정수민은 넥센의 끈끈한 타선을 상대로 5와 3분의 1이닝 1실점으로 막아내고 팀의 4연패를 끊어내는 승리를 이끌었다. 또 지난 1일 두산전에서 5와 3분의 1이닝 무실점 호투로 팀 11연승(15일 현재)의 스타트를 끊었다. 정수민은 15일 현재 1군 7경기(선발 5경기)에 나서 3승 무패 평균자책점 2.97을 기록하며 기대 이상으로 해커의 빈자리를 잘 메워주고 있다. 지난 9일 창원 마산구장에서 정수민과 이야기를 나눴다.NC다이노스 투수 정수민. 정수민은 "영구결번을 남길 수 있도록 한 팀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잘 던지고 싶다"고 말한다.-부산고 한 해 선배 김태군(NC 포수)이 말하길 팀 내 세 번째 투수였다고 하던데, 고교 시절 평가는 어땠나."맞다. 안태경(롯데), 오수호(SK)에 이어 팀 내 세 번째 정도였다. 발전 가능성은 인정받았던 것 같다."그 발전 가능성 덕분에 정수민은 2008년 미국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고 2009년 미국에서 야구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2009년 루키리그에서 시작해 마이너리그 71경기에 나와 210과 3분의 2이닝을 던져 10승 8패 평균자책점 4.14 평범한 성적을 거둔 정수민은 어깨 부상과 병역 문제 탓에 2013년 3월 팀으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았다.NC다이노스 투수 정수민 선수.-미국 생활이 후회스럽지 않았나."원정 거리가 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향수병으로 힘들었지만 후회는 전혀 없다. 모두 내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경험이 지금 많이 도움되고 있다. 마운드에 섰을 때 조금 더 버티는 힘이 되지 않나 싶다."-지난해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NC의 선택을 받았는데 상위 순번에 지명받을 거로 생각했나."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2년을 쉬고 온 상황이어서 어느 팀이든지 선택을 받기만 해도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 1라운드에 지명을 받아 매우 기뻤다. 특히 고향(김해) 팀이어서 더욱 좋았다."NC다이노스 투수 정수민 선수.정수민은 지명 소식을 할머니에게 가장 먼저 전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해 어린 시절 할머니 밑에서 자랐기에 정수민은 할머니와 사이가 각별하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아이고 잘됐네"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지난 5월 17일 팔꿈치 통증으로 빠진 해커 대신 1군에 올랐다. 그전 퓨처스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컨디션 난조도 있었다. 그리고 성적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잘 던질 수 있을지 로케이션을 시험해보기도 했다."-대체 선발이지만 매우 잘 던져주고 있다."해커 빈자리를 메우려고 1군에 올랐으니 해커만큼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그만큼 던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해커가 복귀하면 다시 퓨처스팀 고양다이노스로 갈까.) 감독님이 결정하시는 거니 일단 내 역할을 다해놓고 결과를 기다리겠다."-김태군의 말에 따르면 '투 피치 투수'(던질 수 있는 구종이 2가지인 투수)라던데."아니다. 포크볼 외에도 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투심을 던진다. 가장 자신 있는 구종은 투심이다."김태군은 정수민의 호투에 대해 "투 피치 투수이지만 팔 각도가 좋다. 직구와 포크볼을 던질 때 일정한 각도를 유지한다"며 "신인 투수니 상대팀들이 정수민에 대한 데이터가 적은 것도 한몫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NC다이노스 투수 정수민 선수.-주무기인 포크볼은 원래 던지던 구종인가."아니다. 아예 던져보지 않았던 구종인데 NC 와서 배웠다. 스프링캠프 때 최일언 코치님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익혔다. 보통 8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던데 4~5개월 만에 손에 익었다. 내 손에 잘 맞았다."-야구선수로서 장단점이 있다면."어떤 상황이든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게 장점인 것 같다. 단점이라면, 상황에 몰리면 오히려 너무 적극적으로 대시한다는 것."-롤모델이 있나"따로 없다. 대신 한 시즌 1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들의 경기는 모두 챙겨보고 있다. 아직 배울 게 많다."-야구 선수로서 목표는."내 등번호를 가지는 게 목표다. 영구결번을 남길 수 있도록 한 팀에서 오랫동안 꾸준히 잘 던지고 싶다."
16.06.16.한때 귀농귀촌을 떠올리면 머리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산업현장에서 퇴직하고 바쁜 도시생활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여유를 가지며 사는 것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요즘 귀농관련 단체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농귀촌센터 등에는 새로운 직업으로 농사를 짓고자 귀농귀촌하려는 젊은 사람들의 문의가 많다. 경남 김해시 생림면에서 김해베리팜을 운영하는 신현식(46)·안성희(43) 부부도 그런 경우다.◇학원 운영하며 투잡으로 시작한 블루베리 = 부부는 김해 시내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아내 성희 씨는 학원 일을 한 지 20년이 됐다고 했다. 부부가 열성으로 가르치고 아이들을 보살피니 나름 학부모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학원이었다. 하지만 현식 씨는 평생 직업으로 삼기엔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여겼다. "학원을 운영했던 곳이 구도심이었습니다. 인근 신도시로 젊은 층이 대거 빠져나가고 나이 많은 어른만 사는 그런 도시가 됐습니다. 당연히 학생 수도 줄 수밖에 없었죠. 학생이 많은 신도시로 학원을 옮겨갈까 생각도 했지만 다시 투자하고 학생들을 모집해야 하는 일이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게다가 학원사업은 내리막길일 수밖에 없어 평생직장으로 할 그런 일이 아니었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했는데 농사를 생각했습니다."김해 생림면에서 김해베리팜을 운영하는 신현식·안성희 부부가 블루베리를 따고 있다.함안 칠원이 고향인 현식 씨는 직접 농사일을 하진 않았지만 시골에서 자란 덕에 농사 중에서도 과수농사가 좀 더 편하다는 것을 보고 들었다. 게다가 농사는 정년도 없다. 블루베리가 뜨는 작물이란 것을 익히 알았고, 병해충이 크게 없다는 것도 들었다. 또 과수는 수확시기가 정해져 있어 한철만 바쁘게 보내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이 좋게도 블루베리를 재배하는 지인이 있어 농장을 방문해 알아보고 아내와 의논했다. 또 수확 철엔 직접 따는 것도 해보니 할만했다. 마음을 굳히고 2012년 6월 하우스 비가림시설을 지었다."남편이 블루베리 농사를 지어보면 어떨까 하는데 그땐 제가 농사일을 모르니 하면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해보자고 했죠. 더구나 처음엔 부업쯤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교육을 받을 때 강사로 오신 분이 제게 무슨 농사를 짓는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블루베리라고 했더니 '드레스 입고 농사짓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시골 정서를 전혀 몰랐던 제겐 사실 이 농사도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라니 다른 밭작물은 어떨지 지금도 상상이 안 갑니다."안성희 씨.◇바쁜 농장일로 학생들에겐 소홀…전업 결심 = 현식 씨가 농사를 시작했지만 엄연히 학원을 운영하면서 짬짬이 블루베리를 가꾸는 투잡이었다. 점차 재배면적도 늘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투잡을 하다 보니 한쪽 일이 소홀해지는 것이었다. "처음엔 하루 한 시간 정도 짬을 내 물 주는 것만 하면 됐습니다. 수확 철에도 100여 그루에서 200~300㎏ 정도 딸 때는 괜찮았죠. 몸은 고됐지만 오전엔 수확하고 오후엔 수업을 했습니다. 시험기간이면 보충도 했죠. 하지만 재배면적을 늘린 이후 재작년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되니 한 달 내내 바빴습니다. 학원은 선생님께 맡기고 수확에만 매달렸는데 학원이 정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그해 9월 결국 학원을 다른 선생님에게 넘기고 전업으로 뛰어들었습니다."부부는 말이 쉬워 전업이지 지금 농장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단다. 자금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탓에 일손을 구하기보다는 가족의 힘을 많이 빌렸다고 했다.이제 전문 농사꾼으로 돌아선 부부는 시설과 노지 3300여 평에서 2300그루의 블루베리를 재배해 올해 1억 5000만 원의 수익을 올릴 것으로 기대한다. 비용으로 연간 9000만 원 정도 들어가 부부 각각 3000만 원 정도씩 순수익을 올릴 것으로 계산했다.◇블루베리 수확시기 짧아 가공품 생산 계획 =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아 납품처가 다양한 편입니다. 김해지역 학교급식으로 많이 납품하고 있으며 올해엔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작년보다 줄었지만 개인 주문도 있습니다. 5월 초까지만 해도 현대백화점 납품도 했고요. 그래도 남는 것은 공판장에 보내곤 했는데 올해는 공판장까지 낼 물건이 없을 정도입니다."그렇지만 현식 씨는 지금의 규모나 판로, 수익으로는 여전히 블루베리를 전업으로 하기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수확시기가 3월 중하순부터 7월 상순까지여서 수익 발생 기간을 길게 가져가는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단다. 수확 철뿐만 아니라 다른 시기에도 수익이 나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농장 한편에 어린 열매가 달려 있는데 7월 말, 8월 초까지 수확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물론 생과를 판매하는 목적도 있지만 가공해서 즙이나 잼을 팔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우리가 시내에서 했던 게 교육사업이니 아이들이 생태체험을 하거나 교육농장으로 발전시켜 나가면 좀 더 장기간 수익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금은 둘 다 기회만 있으면 교육을 받으려고 합니다."신현식 안성희 부부.◇농촌으로 출근하는 부부, 마음의 여유 만끽 = 부부는 학원을 접고 나서 하루 생활 리듬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다. 학원 일을 할 때는 밤에 활동하는 올빼미 생활이었다면 지금은 새벽부터 일하는 농부가 다 됐다는 것이다.현식 씨는 "학원을 운영할 때는 새벽 2~3시가 되어서야 잠을 잤습니다. 아무래도 학원 일이라는 게 늦게 끝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저녁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하루는 아침 7시쯤 일어나 집안일 정리하고 농장에 왔더니만 옆에서 충고를 하더라고요. 농사일은 새벽에 시작되는데 그렇게 늦게 일어나면 한낮엔 일을 못한다는 것이었죠. 아차 싶었습니다."성희 씨는 "학원을 오갈 때는 뭔가에 쫓기듯 조바심을 냈는데 여기서는 식물과 대화하는 것이 일이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특히 관심을 둘수록, 정성을 쏟을수록 식물은 정직하게 그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 가장 보람이 있죠. 우리가 이렇게 정성들여 나무를 돌보면 이렇게 예쁜 열매로 보답합니다. 식물은 주인의 정성만큼 자랍니다. 절대 거짓말을 안 하죠."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럽다. 오늘 블루베리를 수확하던 일꾼들이 일을 마치는 시간인 모양이다. 좀 더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바쁜 부부를 붙들었던 탓에 더는 인터뷰 진행이 될 것 같지 않다. 그래도 전업농 2년 차에 불과한 부부가 우리 농업의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듯해 보는 사람으로서 참 뿌듯했다.
16.06.13.하강혁(34) 씨는 지난해 복합문화공간 작당(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을 시작하면서 아내와 함께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대학에서 방사선학을 전공한 하 씨는 병원에서 한동안 일했다. 이후 의료장비를 판매하는 영업, 대기업에서 육상플랜트 감독관을 했다. 직업이 있고, 일한 만큼 돈도 벌었지만 마음속엔 무언가 갈증이 있었다.그냥 이대로 흘러간다면 미래는 어두울 것만 같았다. 그는 내가 원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하 씨는 "뭘 할까, 그게 뭘까, 고민하다가 건전한 놀이공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성인들이 스트레스 해소나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친구들과 술 먹거나 노래방 가거나 클럽을 가거나 대부분 쾌락위주다. 건전한 놀이문화가 없다 보니 성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저 또한 노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영업일을 하면서 접대 때문에 겪었던 갈등이 많았다. 그래서 잘 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창원시 성산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작당 하강혁 대표.작당이다. 한자로 풀이하면 만들 작(作)과 집 당(堂)을 합쳤다. 누구나 무엇을 만들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작당에선 여느 카페처럼 음료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추가 비용을 내면 퍼즐이나 블록 등 게임이 가능하다.지역 인디 문화를 알리기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이 열리며 비정기적으로 강연, 영화제 상영도 한다. 공간 대여도 가능하며 백화점이나 쇼핑몰에서 열리는 문화센터도 운영한다.큰돈을 벌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만큼, 딱 필요한 만큼만 벌었다.소비도 최소한으로 했다. 하 씨는 아내와 함께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고 받아들였다. 그는 현재 가난하게 사는 삶을 연습하고 있다고 했다.하 씨는 "결혼 전에는 돈을 정말 잘 쓴 것 같다. (돈이 생기는)족족 썼다. 좋은 옷과 차를 사고 비싼 자전거를 샀다. 쓸 만큼 써봐서 그런가 지금은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웃음) 소비에 있어서 가난하려고 한다"면서 "마트에서 2000~3000원짜리 옷을 사도 내 몸에 맞으면 되고 깔끔하면 된다. 스스로 상대방과 비교하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런 부분에서 아내와 이야기가 잘 맞았다. 많이 벌어서 남에게 베푸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적게 벌더라도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작당은 지역민은 물론 예술인에게도 열려있는 공간이다.작당은 창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인디 음악 레이블 디어스트림(대표 이선광)과 공동으로 지역 인디 음악가가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매월 셋째 주 토요일 저녁 열리며 적게는 30명, 많게는 60명의 관객이 몰린다. 공연비는 무료였으며 최근에야 음료값(5000원)을 받기 시작했다.작당은 청년이나 인권을 위한 단체에 공간을 무료로 제공한다.사회적 약자 등이 차별받거나 소외되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다.작당 공연 모습. /작당하 씨는 사람들 만나는 걸 좋아하다 보니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모여서 작당모의팀을 만들었다. 좀 더 문화를 즐기고 느끼고 참여하기 위해서다. 팀원은 연극인, 음악인, 영화감독 등이며 현재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작당을 연 지 1년이 조금 넘은 하 씨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한다."공간을 알리고 지역 예술인과 친해지는 데 1년이 걸린 것 같다. 저 자신에게는 긴 싸움이다. 사실 작당을 하면서 후회한 적도 있다. 처음 생각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나 친구들이 돈 되는 장사를 하라면서 저를 이해하지 못할 때 흔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아내가 왜 이걸 시작했는지 초심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고맙다. 앞으로 작당을 누구나 편안하게 와서 쉴 수 있는 공간, 좋은 에너지를 얻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노력하고 시도하고 있으니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둬줬으면 한다."하 씨는 두 달 전부터 대리운전 기사도 병행하고 있다. 작당에서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일하고 오후 9시부터 오전 2시까지는 대리운전 기사로 일한다.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고난이라는 파도가 없으면 인생이 재미가 없다. 대리운전 기사를 한다고 해서 작당이 실패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운영을 더 잘하고자 시작한 일이다"면서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작당을 알리고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16.05.23.경남경찰청 교통관리센터에서 강석동(51) 경비교통과 교통안전계 경위와 마주 앉았다. 그는 수북이 준비한 자료를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메모도 틈틈이 했다. 경찰 제복을 입기는 했지만 학자 느낌이 물씬 났다. 실제 그렇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교통안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석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기 때문이다.20년 넘은 교통 업무 베테랑지난해인 2015년 조현배(55) 청장 부임 이후 경남경찰청은 '교통 문화 개선'을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한 중심 부서가 교통안전계로서, 도로 위 안전대책을 총괄한다. 계절별·교통수단별 대책을 1년 내내 세우는 건 기본이다. 도로 단속, 출퇴근길·축제 교통 관리, 관련 시설물 정비, 요인 기동경호 등도 맡고 있다. 강석동 경위는 이를 관리하는 '안전 주임'이다."지난해 도내 교통사고 사망자는 390명이었습니다. 살인사건으로 연간 40여 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수치죠. 결국 저는 도민 생명과 직결된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1명이라도 더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 고민을 이어가고 현장을 나가야 합니다."올해 300만 명이 찾은 진해군항제 역시 교통문제가 말썽이었다. 올해 처음으로 일반 차량 통제 후 셔틀버스 운영을 시도했지만 관광객들 원성은 크기만 했다."창원시가 진주유등축제를 벤치마킹해 구상안을 내놓았습니다. 우려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진주는 개인 차량으로 시내까지 들어가는 형태지만, 진해는 축제 중심가와 떨어진 곳에서 통제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다 안내 시설·인원 부족 등 전체적으로 미숙했습니다. 의욕은 있었지만 유기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부분이 컸던 거죠. 종합평가보고회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개선책을 찾아야죠."강동석 경비교통과 교통안전계 경위.최근 보복·난폭운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다. 지난 2월 12일 도로교통법 개정에 따라 직접적인 처벌 근거가 마련됐다. 경남경찰청은 한 달 보름간 집중 단속을 해 하루 한 명꼴인 44명을 입건했다. 물론 단속보다는 대국민 홍보에 방점을 둔 정책을 이어간다는 계획이다.이 대목에서 '비상 깜빡이 적극 활용 캠페인'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그는 펜으로 적어가며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강 경위는 20년 넘은 교통 관련 업무 '베테랑'이다. 그 세월 속에서 도내 도로 곳곳에 손길이 닿아있다."2002년 즈음에는 창원에서 가장 막히는 곳이 창원병원 사거리였습니다. 그 정체 여파가 온 시내에 영향을 끼쳤죠. 당시 시에서는 지하도 건설을 고민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800억 원 정도 필요했습니다. 저는 5억 8000만 원만 들어가는 방안을 추진했습니다. 도로구조를 개선하고, 이용이 덜한 신호를 없앤 후, 전체 신호 연동체계를 바꿨습니다. 그때부터 창원병원 사거리의 만성체증이 없어졌어요. 그 덕에 연간 1200억 원을 절감할 수 있게 된 거죠. 당시 국정감사에서 좋은 사례로 언급되기도 했습니다."최근 창원시 성산구~진해구를 잇는 안민터널도 차량 흐름이 좋아졌다. 이 역시 신호개선, 도로구조 개편, 예산 확보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경찰·자치단체·관련단체가 끊임없이 머리를 맞대고 손발을 맞춰야 한다. 정책 수립이라는 게 원래 그렇듯 윗선 결정이 중요하지만, 결국에는 실무자 의지가 크게 좌우한다."아무리 아이디어를 내도 안 먹힐 때가 있죠. 결국 사고가 일어나서야 추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어느 자치단체 공무원은 무단횡단으로 사망한 가족이 있다 보니, 위험을 제거하는 도로 개선에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저와 아주 죽이 척척 맞았습니다. 민원이 들어오거나 개선책을 추진할 때 '된다'는 명제 아래 시도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부정적이면 생각조차 막혀버리기 때문입니다.""아이디어 고민이 즐겁습니다"강석동 경위는 하동군 청암면이 고향이다. 청학동과 멀지 않은 곳으로 스스로 '산골짜기'라고 표현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농업 관련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자연스레 품은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무 살 지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다 순경 시험을 봤다. 준비 기간은 석 달도 안 됐지만 한 번에 합격했다. 어릴 적부터 한자를 익혀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중앙경찰학교에서 1000명 중에서 2등으로 교육을 마쳤다.경찰 제복을 입고 나서는 대산지서를 시작으로 사림파출소, 창원중부경찰서, 지금의 본청 등 줄곧 창원에서만 근무하고 있다. 교통 관련 업무는 한 선배의 권유로 1995년 처음 맡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현장에서 범인을 검거하는 일은 성격도 거칠고, 신체도 어느 정도 뒷받침돼야 하는데요, 저는 이쪽 분야가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창의적인 부분에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제가 외우는 머리는 있는 것 같아요. 수학은 못 하지만 숫자는 잘 기억합니다. 수십 년 된 전화번호도 다 남아있고, 쌩쌩 지나치는 차량 속에서 지인 번호판이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강동석 경비교통과 교통안전계 경위.지금까지 국무총리·경찰청장 등 표창을 32번 받았다. 이 모든 건 창의적 업무 실적과 관련해 있다.높이 4~5m 되는 신호등이 있으면 대형구조물 운송 차량이 지나가기 어렵다. 예전 창원 공단로 같은 곳에서는 이러한 차량이 지날 때마다 신호등을 해체했다가 재설치하는 식이었다. 시간·인력·비용 등 모든 면에서 비효율적이었다. 이에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접었다가 다시 원위치할 수 있는 '회전식 신호등'을 추진했다. 2003년 전국 최초 도입이었다. 지금은 전국 곳곳에 이러한 시스템이 퍼져나가 있다. 교차로 상황관리카메라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예전에는 블랙박스가 없다 보니 사고가 나면 원인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운전자가 '신호위반 안 했다'고 우기면 밝혀내기 어려운 거죠. 그 때문에 경찰력, 소송비용, 사회적 불신 등 낭비 요소가 엄청난 거죠. 그래서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를 생각했습니다. 창원 시내 몇 군데에서 운영했는데 역시나 분쟁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주요 교차로 120군데로 퍼져 나갔죠."그는 각종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표현과 글쓰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안고 있다."한때 1년 정도는 각종 신문 사설이라는 사설은 다 읽었습니다. 창의적인 생각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글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때 신문을 탐독했던 게 지금까지 큰 자산으로 남아있습니다. 경찰은 부서별로 보도자료를 작성하는데요, 기자들에게 전화가 오면 잘 못 만들었다는 뜻이죠. 자료만 보고 이해하면 기자들이 전화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저는 아무래도 좀 나은 편이죠. 하하하."교통안전교육 마련에 대한 미련강석동 경위는 1993년 결혼했다. 아내는 지금까지 좋은 업무 파트너(?)다. 도내 교통 구조물을 살피기 위해서는 현장을 부지런히 다닐 수밖에 없는데, 아내는 드라이브 삼아 주말마다 함께했다. 지금은 각종 제보를 하기도 한다."시원찮은 교통경찰관보다 집사람이 나아요. 예전에는 전구식이라 신호등 나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집사람은 차에서 백미러를 보고서도 '뒤에 신호등 황색 나갔다'고 말해 줄 정도입니다. 또 생명보험 일을 하면서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저한테 신고합니다. 농담으로 '한 건에 5000원'이라는 말도 주고받죠."현장을 두루 다니고 사람들 만나기 바빠 주로 사복을 이용한다. 20대 딸·아들에게 경찰 제복 입은 모습을 별로 보여준 기억이 없다. "아빠 경찰이었어?"라는 농담을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도 그는 가족 외출 때 "저 신호체계를 이 아빠가 바꿔놓았다"라고 어깨 으쓱이며 말할 수 있다.강동석 경비교통과 교통안전계 경위."발명가들이 뭔가를 만들었을 때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잖아요. 저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동 촌놈이 창원이라는 거대 도시를 비롯해 도내 곳곳 교통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머리 짜내고, 그것이 성과로 이어졌을 때, 그 성취감은 대단하지요. 도로 위에서 곧바로 보이는 것이니 더더욱 그러하지요. 교통안전 업무는 결국 도민 생명을 지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 매력에 빠져 20년 넘게 열정을 쏟고 있네요."조직에서 허락한다면 좀 더 많은 걸 쌓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 속에서 현실적 한계에 대한 고민도 많다."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도로를 이용하잖아요. 그만큼 중요한 공간입니다. 하지만 안전의식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 체계는 없죠. 우리 사회에 교통안전 교육을 시스템화하는 것이 저의 이상적인 꿈입니다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16.05.20.★아너소사이아티(Honor Society)는 나눔문화를 실천하려는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입니다."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데…. 돈이 많거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저 고향에서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가 받은 것을 어떻게 돌려줄까 고민하는 그 정도입니다. 뭐 나눔에 대해 깊은 생각이 있거나, 남 앞에 나서서 설득할 뚜렷한 철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하려니 쑥스럽습니다."한철수(64) 회장. 그는 경남아너소사이어티 5번째 회원이면서 아너소사이어티를 모으고 관리하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이 밖에도 고려철강을 운영하는 대표이자, 창원상공회의소 마산지회장이라는 직함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직책에서 알 수 있듯 역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한 회장. 그가 꿈꾸는 함께 어울려 사는 나눔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구김 없이 자란 유년시절한 회장은 스스로 마산 토박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잠시 서울에서 있었을 뿐 마산에서 나고, 자라고 지금까지 마산에서 살면서 기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마산 중성동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지금 백제삼계탕 근처 그쪽 동네라고 보면 돼요. 지금은 1남 3녀 장남인데…. 어릴 때 남동생이 죽었어요. 그때는 퇴비 증산한다고 풀을 베오라고 학교에서 시키고 그랬어요. 아마 중학교 1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북마산 파출소 아래로 흐르는 하천에 가서 며칠 풀을 벴는데 동생이 따라다녔죠. 그때 하루는 모기에 심하게 많이 물렸는데 그러고는 동생이 시름시름 아프다가 죽었어요. 뇌염이라더군요. 그래서 아직도 죄책감이 있어요. 그 기억 외에는 별일 없이 유복하게 유년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마산공고 선생님이셨죠. 그리 잘 사는 집은 아니었어요. 그냥저냥 밥걱정은 안 하는 그 정도 형편이었습니다. 대학 때 빼고는 모두 마산에서 살았네요. 그러니 제게는 특별하고 고마운 곳이죠. 이곳에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먹고 살게 해줬으니까요. 허허."한 회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곧잘 했다. 성호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당시 엘리트 코스라 불리던 마산중학교,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진학한다.한철수 주식회사 고려철강 대표이사."아버지 별명이 냉장고라고 꽤 엄한 분이었어요. 외할아버지가 독립투사 죽헌 이교재 선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도 올곧고 꼼꼼하고 엄한 편이셨어요. 특히 어머니가 공부에 애착을 많이 보이셔서 제가 어릴 때부터 숙제나 공부하는 것을 꼼꼼히 챙기셨죠. 그 덕에 공부는 잘했어요. 허허. 그런데 중학교 갈 때는 재수를 해서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치다 한 과목 실수를 해서 떨어졌어요. 그래서 성호초등학교를 1년 더 다녀서 7년 만에 졸업했습니다."그는 당시 자신을 수줍음을 몹시 많이 타는 소심한 성격의 소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 성격이 바뀐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반장을 한 것이 계기였다고 말했다."고등학교 3학년 때 반장을 했어요. 그때는 학생들이 선출하지 않았고 담임선생님이 지목하는 방식이었죠. 반장을 하라고 하는데 잠을 못 잘 정도로 진짜 스트레스였어요. 얼마나 소심한 성격이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런데 반장을 하면서 남 앞에 나서면서 조금씩 조금씩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고, 자신감이 붙었어요. 그 뒤로 완전히 성격이 바뀌었죠. 아니 원래 제 성격이 외향적인 것을 그때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죠. 아무튼 그게 아마 제 인생 첫 번째 터닝 포인트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대학, 새로운 세상을 접하다그는 기계공학과 선택은 실수였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대학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을 접할 수 있었다."아버지께서 이공계 쪽 학교를 다닌 영향으로 아무 생각 없이 기계공학과로 진학했습니다. 고려대 기계공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담임선생님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셨답니다. 원서 넣고 한두 달 미친 듯이 공부해서 합격했죠. 그때가 한창 산업화가 시작하는 시기여서 기계공학과 나오면 바로 취직되던 때입니다. 아버지 바람대로 아무 이견 없이 진학한 거죠. 그런데 수업이 너무 재미 없어서 못 하겠더라고요. 제도하고 설계하고 이런 것이 전혀 적성에 안 맞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인문학 계열이 적성이 맞아요. 나중에 친구들과 이념서클에 가입을 했어요. 청년문제연구회라고. 실제 학교생활 기억은 서클 활동했던 게 더 많아요."하지만 1학년을 마친 그는 건강이 악화해 휴학을 하게 된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회복하지 못해 더 힘든 시기를 보냈을 것이라고 그는 회상했다."1학년 마치고 겨울 방학 때 마산에서 지냈어요. 방학이 끝나가는 때인데 기침이 계속되고 얼굴도 그렇고 몸이 영 안 좋아 진찰을 해봤습니다.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결핵으로 폐가 한쪽이 완전히 구멍이 나 있었어요. 바로 가포 결핵병원에 입원했죠. 병원에서는 상태가 안 좋아 폐 한쪽을 잘라내자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3대 독자인 제 몸에 손을 댈 수 없다고 거부해서 그냥 치료만 하기로 했어요. 병원에서는 쉽게 치료가 안 될 거라고 했는데…. 6개월 만에 기적같이 싹 나았어요. 의사도 놀랐죠. 어머니가 개소주부터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챙겨주시고 돌봐주시고…. 지극정성으로 아들 완쾌되길 빌고…. 그 덕에 나았어요. 완전히 싹 나아서 나중에 군대도 문제없이 갔죠. 물론 3대 독자라서 6개월 방위로 근무하다 제대했지만…."한철수 주식회사 고려철강 대표이사.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4학년이 되면서 청년문제연구소 서클 회장이 된다. 당시 유신 시절이라 계엄령이 내려지고 대학가에서는 연일 집회가 열리던 시기였다. 한 회장도 이러한 현실에서 비켜설 수는 없었다."서클 활동을 하면서 선배들이 대학생으로서 그 시대에 고민해야 할 것들을 많이 깨우쳐줬죠. 그때부터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었어요. 사실 그전에는 온실 화초처럼 공부만 하면서 어려움 없이 자랐으니 세상을 잘 몰랐죠. 야학 선생도 해보고 또 노동현장도 경험하면서 세상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죠. 힘들게 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노고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요. 또 그때 한참 데모를 많이 하던 때라 서클 선후배들이 많이 잡혀가서 구속되고 그랬죠. 설훈 의원이 마고 동문이고 같은 서클회원인데 설 의원도 그때 구속됐죠. 저도 경찰에 여러 번 잡혀가서 조사를 받았지만 구속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서클 회장을 맡았지만 구속되지 않은 것은 제가 깊숙이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교직에 계시니 아버지에게 악영향이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제가 3대 독자다 보니 집에서 걱정을 많이 하셨고요. 저도 심려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짙었어요. 어떻게 보면 비겁했죠. 참 그때 심적인 갈등이 말할 수 없이 심했죠. 그때 고민하고 미안해하는 저를 보고 설훈 의원을 비롯해 선후배들이 '나중에 준비가 되면 그때 세상을 위해 나서면 된다. 성공해서 열심히 돈 벌어서 세상을 위해 보람있게 사용해라. 그러면 된다'고 오히려 저를 위로하고 그랬죠. 그때 그게 부채의식으로 남아 제가 나눔을 실천하는 한 계기가 된 것이라 생각해요."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대학을 졸업한 그는 곧장 취직했다. 당시 창원공단이 들어서던 때라 창원에도 대기업이 속속 입주하고 있었다. 그는 기아기공에 입사해 구매업무에 배치된다. 그것이 인연이 돼 철강유통 분야에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됐다."78년도였으니까 제가 27살 때일 겁니다. 기아기공은 졸업 전에 1월 1일부터 출근하라고 하더군요. 그때 처음 발령받아서 근무한 데가 구매부서였습니다. 탱크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철강과 특수강을 구매 주문하는 부서죠. 이게 계기가 돼서 아직도 철강 분야에서 밥을 먹고 있습니다. 허허. 운명인가 봅니다. 딱 3년 다니고 퇴사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려고 대학원 진학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안 되면 차선책을 철강유통 회사를 차릴 생각을 했습니다. 철강 유통 마진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좀 쉴 틈도 없이 다른 사람이 이 사업을 시작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마음이 급해졌죠. 부랴부랴 교수하겠다는 꿈을 버리고 사업에 뛰어들었죠."1981년 그는 고려철강이라는 이름으로 철강유통회사를 설립한다. 직원이라고는 한 회장 혼자밖에 없었고 회사 집기라고는 책상과 전화가 전부였다.한철수 주식회사 고려철강 대표이사."지금의 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고속버스 터미널 뒤쪽에 남의 사무실 한쪽에 전화 하나 놓고 더부살이로 시작했어요. 기아기공하고 거래했죠. 점점 성장하면서 1985년에는 자유무역지역 정문 맞은 편에 60평 사무실을 사서 이전했습니다. 그때는 화물차를 사서 직접 운전해서 배달 다니기도 했고요. 급할 때는 경리 아가씨랑 둘이서 직접 철근을 싣고 내리기도 하고 그랬죠. 그러다가 1991년 봉암공단에 250평 규모 공장을 지어서 이전했습니다. 그때 매출이 처음으로 100억 원을 돌파했습니다."고려철강은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신촌리 진북일반산업단지 내에 공장을 두고 있다. ㈜세아베스틸(옛 기아특수강), 세아창원특수강(옛 삼미특수강), 한국철강㈜의 대리점으로 자동차·산업기계·공작기계 구조용강, 방위산업용 특수강과 파이프 등 철강·특수강을 취급하는 유통업체다. 철강·특수강 생산업체로부터 원자재를 받아 수요자 요구에 따라 1차 가공 후 공급하는 방식이다. 2010년에는 특수강 유통회사인 고려스틸을 별로도 설립해 사업을 확장했다. 전화 하나로 시작한 회사는 지난해 매출이 700억 원가량이며 현재 30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동안 사업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기업 대부분이 그렇지만 고려철강 역시 IMF 외환위기가 부도와 직면했던 가장 힘든 시기였다."초창기에 우리가 부품을 장착한 제품을 공급했는데 문제가 생겨서 4억 원에 가까운 손해 배상을 한 경우가 있었어요. 그때 초창기였으니까 4억 원이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지인에게 보증을 섰다가 제가 대신 다 갚아야 하는 일도 있었죠. 한 5억 원 정도였는데 그때도 휘청했어요. 두 번 다 힘들게 견뎠죠. 가장 힘들었던 때는 뭐니뭐니해도 IMF 외환위기입니다. 그때 기아자동차가 부도가 나면서 이후 외환위기가 찾아왔지 않습니까. 저희 주거래업체가 기아그룹입니다. 기아그룹과 거래하는 업체는 모두 위기였죠. 동종업체 절반은 부도가 났어요. 저도 부도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돈은 없고 어음은 돌아오고 진짜 너무 힘들어 며칠을 고민했어요. 부도를 내고 다시 재기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버티느냐를 두고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생각을 했겠어요. 폐결핵 이후에 한 30년 만에 그때 담배를 피웠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에…. 밤에 부도가 나서 힘들어하는 꿈을 꾸다가 얼마나 많이 깼는지…. 다시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사실 부도내고 다시 재기하는 것이 금전 손실이 더 적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죠. 고향이 여긴데 토박인데 불명예스러운 짓을 해서는 되겠느냐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버텼죠. 기업에서 신용이 생명인데 신용을 버리면 다시 회생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그가 위기를 넘을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쌓아온 신용 덕이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는 데는 대략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신용이 좋아서 한 20억 정도 외상으로 물건을 주는 곳도 있었고요. 은행 대출도 받고 또 보증 섰다가 대위변제 해줬던 친구가 재기하면서 도와주고 그러면서 어렵게 버텼죠. 제가 사업하는 데 인덕이 있어서 그런지 주위에서 많이 도와줘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현행유지를 하고 있습니다."인생 최고의 후회 없는 선택한 회장은 비교적 일찍 경남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2010년 7월 다섯 번째 회원으로 이름 올렸다. 더 놀라운 점은 도내 네 번째 부부회원이라는 것이다. 한 회장 아내 최선자(60) 씨는 2014년 4월, 1억 원 기부를 약정해 34번째 회원이 됐다."그전에 회사 차원에서 어려운 이웃집 고쳐주기를 자체적으로 하기도 했고, 회사 이익이 생기면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기탁도 자주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인 부탁으로 7년 들었던 적금이 만기 됐는데 9500만 원이었어요. 어디에 사용하겠다는 목적 없이 들었던 적금이라 고민이 되더라고요. 저는 평소에 '저승에 10원도 못 가져갈 것 쌓아두면 뭐하나' 그런 이야기 자주 하거든요. 그래서 내 삶의 흔적 하나를 세상에 남기자는 생각에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결정했어요. 그것이 오래 남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사람도 그런 마음에 동조해서 가입했고요. 자식이 셋인데 강요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스스로 돈을 벌어서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했으면 하는 기대도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다는 것, 그것도 멋진 일이잖아요."그가 나눔을 실천하게 된 계기는 대략 두 가지라고 추측했다.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는 아버지의 주문과 대학 선후배들에 대한 부채의식."아버지께서 교육자 집안 자식으로 그리고 독립투사 피를 물려받은 사람으로 남에게 베풀고, 부끄럽지 않게 살라고 가르치셨어요. 대학교 때 선후배들과 같이 세상을 바로잡는 고민을 했고, 그들은 실천하다 구속되고 했지만 저는 제가 처한 현실 탓에 앞장서지 못했죠. 나중에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했고 그걸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남들은 저를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그나마 이 정도 살 수 있었던 것은 다 주변 도움 덕분입니다. 부모님 덕에 힘들지 않게 공부하고, 지인들 도움으로 부도 위기를 몇 번 넘기면서도 망하지 않고 돈을 벌고 있고…. 다 주변 사람들과 고향 마산 덕이라고 생각합니다."이처럼 그는 나눔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이 때문에 그는 2014년부터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가 회장이 된 후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급격히 늘었고, 매년 사랑의 온도계 모금액도 꾸준히 늘고 있다."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국민 성금을 모으고 그 돈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사용하도록 관리·운용하고자 설립된 기관입니다. 나눔 문화를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최선봉에서 일하는 기관이죠. 제가 이 기관 경남 대표를 맡은 것은 뭐 딱히 특출나거나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제가 영업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맡기지 않았을까요. 허허. 회장이 되고 제가 잘 아는 기업인에게 각각 성향을 분석해서 자필로 편지를 돌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업에도 편지를 보냈고요. 꾸준히 설명하고 홍보하고 다닙니다. 제가 회장으로 취임할 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34명이었는데 2년 만에 74명으로 늘었습니다. 성과라면 성과인데 남은 기간에도 꾸준히 홍보를 해야죠."나눔 확산, 인식개선과 교육이 중요한 회장은 나눔 문화가 제대로 정착하려면 인식 개선과 교육이 중요하다고 분석했다."기부 결정을 꺼리는 이유 중에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는 사람이 많아요. 대부분이죠. 하고 싶어도 남들이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이죠. '주변에는 못하면서 돈 자랑 하려고 저런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하는 걱정이죠. 외국처럼 명예롭게 봐주지 못하고 시기질투 하는 점이 걸림돌이죠. 이런 문화가 개선돼야 합니다. 그리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죠. 하지만 여러 사람이 알고 또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생겨야 나눔 바이러스는 확산합니다. 저도 똑같은 고민을 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할까 봐 익명으로 기부하려다 주변 권유로 실명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그런 고민은 필요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많은 칭찬과 격려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참 잘한 선택이라 생각했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면서 뿌듯하고 보람차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에게도 권유했고요.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걱정 벗어 버리고 저지르세요. 인생 최고의 후회 없는 선택이 될 겁니다. 그리고 기부하고 나누는 것도 익숙하지 않으면 잘 못 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교육이 필요합니다. 자녀 이름의 통장에 매달 5000원씩 적립해 나중에 그 돈을 기부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좋은 교육입니다. 큰 금액이 아니라 소액기부도 아주 소중합니다. 재능기부도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부모가 최고의 스승입니다. 솔선수범으로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과 있다고 생각합니다."한 회장의 나눔은 책임감과 부채의식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지향하는 것은 함께 잘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다."사실 세상은 공평하고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또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타고난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죠. 저는 좋은 부모 만나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또 주변 사람과 지역 사회 도움으로 이 정도라도 살고 있습니다. 실패한 인생은 아니라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지금 행복합니다.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주변 덕분이지요. 그런데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누리는 것들을, 제가 느끼는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요. 제 작은 나눔이 많은 이의 동참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길 바랍니다. 혼자 잘살면 무슨 소용입니까. 함께 잘 살아야 더 좋은 세상이죠."
16.05.12.